기술서적

제럴드 라우닝의 '천 개의 기계들'과 마르크스의 기계단상

"기계는 도구에서 이어지는 시퀀스라기보다 다른 계보의 형태"

이성규 2017년 11월 04일

A Thousand Machines

2장 Machine Fragments(기계 단상들)

  • 기계에 관한 것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답을 하기 쉽지 않지만, 정확하게 질문들은 제기돼왔다. 그 질문은 확실히 이런 건 아니어야 한다 : 기계는 무엇이고, 누가 기계인가? 이런 질문은 본질적인 질문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질문이며, 존재(is)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and에 대한 질문이며, 기계를 구성하는 연속과 연결, 구성요소와 운동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자전거란 무엇- ‘이라고 말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19)
  • 기계에 대한 공통적인 개념은 기계적 대상을 언급하게 되는데, 그 대상은 물리적인 구획으로 결정될 수 있고, 또는 목적의 사용성(usability)으로 결정될 수 있다.
  • 기계라는 용어의 의미는 13세기 기술적이고 기계론적인(mechanistic) 수준에서 제한돼 쓰이기 시작했고, 명확히 범위를 정할 수 있는 감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7세이 이후로는 이 용어의 급진적인 명확함으로 발전돼 왔다. 프랑스어인 ‘machine’의 영향을 거쳐 순수하게 기술적인 용어로 독어와 영어로 들어오게 됐다. 물론 당시에도 라틴어인 ‘machina’ 개념과 파생적 의미들이 존재한 상태였다.(19)
  • 17, 18세기 기술적 기구나 장치의 발전,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계에 대한 지식과 보급 등을 거쳐 거대한 (의미적) 도약은 기술적 기구의 경제적 장치(dispositif)의 발전에 따라 19세기 때 이뤄지게 됐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 기능과 이러한 기구의 착취적 배치는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20)
  • machina의 광범위한 개념이 그 전에는 기술적 함의만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들의 배치로서 격렬히 제한된 것은 17세기에 시작됐으며 이런 의미와 함께 다양한 기계적 측면의 위계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중략) 이 시기에 기계로서 인간, 기계로서 국가, 기계로서 세계라는 메타포가 널리 활성화됐다.(20)
  • 19세기 무렵에, 20세기에는 확실히 현실화됐던 기계 개념의 리/디코딩의 지시(indication)가 이미 존재하고는 있었다.(20)

마르크스의 기계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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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기계를 간결하게 ‘잉여가치 생산 수단’으로 바라봤다. 달리 말하면, 확실히 노동자의 노동 투입을 감소시킨다는 의도로 쓰진 않았다. 오히려 착취를 최적화하는 것으로 간주했다.(21)
  • 마르크스는 자본 13장에서 기계류의 기능을 3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설명했는데, 노동력으로서 인간 활용성, 노동 시간의 연장, 노동의 강화 등이다.(21)
  • 마르크스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주로 사회적 예속이나, 산재한 노동자들의 산노동에 포함된 이질적인 권력으로서 기계의 간섭으로 설명했다. 이들 노동자들은 기계 시스템의 부분(부속)으로 그리고 이 기계류에 (부착된) 살아있는 액세서리로 기능한다.(22)
  • 자본은 전체 생산 프로세스에 그 자신들을 복종시키는 산노동에 대한 일종의 권력으로 이 개념을 발전/확장했다.
  • 자동화 시스템은 그 자체를 움직이게 하는 움직이는 힘으로 규정된 것 같았다. 순수한 기술적 장치로서, 혹은 순수히 무기체(anorganic, 살아있지 않은 구성물)의 의미로, 자동화는 기계단상에서는 마르크스가 상상하지 못했던 개념이다. 오히려 수많은 기계적, 지적 기관(ograns)의 구성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22)
  • 이러한 관점에서, 기계에 대한 인간의 행위는 철저하게 기계류의 명령에 복속돼있지, 다른 방식은 아니었다. 심지어 기계 개발 과정에 구성(투입)되는 비물질적이고 지적이며, 인지적인 작업(work)은 (기술적 장치에 인클로징 된 탓에) 기계 내에서 실현된 인간 구성 요소에 대한 이질적이거나 기계의 부가적인 인간력이 되었다(23)
  • 인간에 대한 기계의 지배라는 큰 방향에서, 노동자와 노동 수단의 관계 역전은 두구에서 시작해 구성된(composite) 기술적 장치로 나아가는 선형적 발전을 통해, 혹은 노동 프로세스 내에 스며있는 위계를 통해 정의될 뿐 아니라 지식에 대한 권력의 역전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사회적 예속의 논리로 보면, 모든 과학은 자본에 복무하기 위해 갇힌 존재와도 같다. (23)
  • 기계에 내재한 모든 지식을 객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지식 생산자들은 노동 프로세스에 대한 분리되지 않았던 일관성과 권력을 잃어버렸다. 산노동 자체는 그 자체를 한편으로는 기계 안에서 객체화되고 죽은 노동으로 간주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류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점들 속에서 단일한 산노동의 노동자 사이에 쪼개지고 분리된 것으로 간주된다.(24)
  • 기계단상을 서술한 마르크스에게조차도 수많은, 자기 실현적(self-active) 기계는 기계장치(mechanism) 그 이상의 것이다. 기계는 더이상 기술적 측면에 제한되지 않으며, 대신 기계-지식적이고, 사회적 배치(social assemblage)가 된다. 기술과 지식은 노동자들에게 일면적 영향을 미치지만, 기계는 기술과 지식, 기계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의 연속체일 뿐 아니라 사회적 기관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24)
  • 기계는 또한 사회적 예속과 기계적 노예화라는 중첩적 관계를 극복하는 섬광을 생성하고 그런 이유로 가능하다. 단, 인간 지능의 필요적 집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경로는 마르크스가 잠재성을 열어젖힌 일반지성의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25)
  • 기계에 대한 단상은 지식과 스킬이 축적되고 사회적 두뇌의 일반 생산력으로서 고정자본에 흡수된다는 팩트, 그리고 생산을 지식으로 전환하는 프로세스는 곧 ‘자본의 경향’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경향의 역전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
  • 지식과 테크놀로지의 연속은 고정자본에서 소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술적 기계과, 그 안에서 객체화된 지식을 넘어서 참조(refer)된다. 사회적 협력과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기계적 노예화뿐 아니라 비물질 노동의 능력으로서. 오뻬라이스트 이론이 후에 주장하는 이런 형태의 노동은 축적의 개발 하에서 조건을 파괴한다. (26)

들뢰즈와 가따리의 안티오이디푸스

  • 노동 수단으로 기능하던 손에서 기술적 장치를 운영하는 손으로, 나아가 기계와 인간 종속성에 기초한 완전한 자동화로 확장해온 오랜 선형적 역사는 그것의 중요성을 상실하게 됐다. (중략) (점차 확장되면서) 기계의 개념은 기계적 기능성의 메타포로 더이상 언급되지 않게 된다. (26)
  • 미래주의의 기계환상적 문헌,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적 사이버네틱스를 거쳐온 구성주의와 초현실주의, 캉길렘과 시몽동의 과학철학, 확장된 기계의 이해까지 나아가는 도나 헤러웨이 그리고 사이버 페미니스트 인터네셔널 등이 세기의 마지막 전회 과정에서 등장했다.(27)
  •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근대의 경계에 걸친 전근대 기계 개념의 확장이 마침내 이러한 바운더리로 투과해온 역사적 선형으로 간주하지 않고, 대신 이 같은 운동 각각의 역사적 맥락에서 조사(연구)되고 있다.(27)
  • 기계주의와 오거니즘은 무한하고, 차이 없는 공허한 반복, 종합적인 기능성, 부분들의 엄격한 종속의 아이디얼한 개념을 공유한다.(28)
  • 반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기계는 흐름과 파열의 동시성에서만 발견된다. 인간 신체는 파멸하고 기술적 장치는 역기능적으로 되거나, 사보타지의 나무 신발짝으로 중단되는 것이다. 아니면 내전으로 국가가 허물어지거나 엑소더스로 도피하게 되는 것이다. (29)
  •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라는 개념의 또다른 비유적 의미(sense)로 만들어지길 원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 용어를 일상적 의미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둘 모두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고 새롭게 주조하고 싶어했다. (29)
  • 들뢰즈와 가따리는 마르크스가 기술한, 기계의 전환에 내재한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이러한 논리의 기초로서 마르크스가 상정한 프레임워크에 더 의문을 품었다. 즉 모든 사회적 형식(Social form)에 대한 인간과 자연 공통체(nature common)의 차원 말이다.
  • 도구에서 대변동으로 향해가는 선형적 발전은 - 이 경로는 기계가 궁극적으로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상태로 되는 것 - 기계 시리즈의 한 측면으로서 기계로 동시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30)
  • 따라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가 더 간단한 도구들을 따르는, 형태에 대한 질문이라는 관점, 다시 말해 인간과 도구가 어떻게 기계화하는지에 대한 관점에서 어떤 사회적 기계가 특정한 기술적, 감성적, 인지적, 기호적 기계의 등장을 만들어는지 그리고 그들의 연속성이 가능하고 필요한지 질문을 제기한다.(30)
  • 도구와 기계를 하나의 시리즈로 배치하는 대신, 들뢰즈와 가따리는 두 개념 간의 더 근본적인 차이를 탐색한다. 그 차이는 도구에서 기계로 이어지는 시퀀스라기보다 다른 계보의 형태로 설명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마키나(machina)에 대한 전근대적 이해에 의지하는 무언가이다.
  •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이 차이는 개념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뤄진다. 기계는 커뮤니케이션 팩터이지만, 도구는 커뮤니케이션 없는 확장태거나 인공기관(prosthesis)이다.(31)
  • (기계를 인간을 대체하는 무언가와 구분함으로써) 들뢰즈와 가따리는 간편한 문화적 비관주의 -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라는 특성을 지닌 - 로 단언하는 것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기계의 특정 형태에 대한 너무도 간단하고 낙관적인 축복으로부터도 차이를 두기도 했다.(32)
  • 순전히 기계적 개조로서 인간의 기계화 내러티브는 문명 비판적 발전이나 행복 경향성 측면에서나 기계성(the machinic)을 놓치게 된다.(32)
  • 가따리에 따르면, 기계의 주된 특징은 구성 요소의 흐름이다. 즉 모든 확장이나 대체는 커뮤니케이션- 없음(communicationlessness)일 수 있으나 기계의 품질은 정확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교환에 대한 반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33)
  • 가따리는 반복적으로 기계와 구조, 그리고 기계와 국가 기구의 다른 품질에 대해 지적을 했다. 기계는 관리나, 다른 것들을 고립시키는 줄무늬 자산(striating entities)에 제한돼있지 않다. 기계는 다른 기계에 열려있고, 그것들과 함께 하며,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로 나아간다.(33)
  • 가따리는 이미 1960년대부터 그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특히 미시정치적 경험과 조직 내 좌파적 실험에 대항하여 그 개념에 천착해왔다.
  • 가따리가 그의 첫번째 기계 관련 저작(1968년을 경험한 뒤 쓰여진)에서 다룬 문제는 지속되던 혁명 조직의 문제다. 다양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특히 국가적 구조 속에서 그 자신의 고립시키지 않는 것을 보증해야 하는 기관적 기계(instituent machine)이다. (34)
  • 이러한 관점에서 가타리의 확장적 기계(extensive machine) 개념은 구조화와 국가 기구화의 위험으로 나아가려는 기계에 반대하는 전략이일 뿐 아니라 커뮤니티 개념의 정체성 닫힘 효과에 저항하는 전략이기도 하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