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저널리즘

'독자 맞춤형 터미널 신문' 시대는 왜 도래하지 않았을까

1982년엔 '신문사와 계약된 터미털을 가진 독자는 당일의 뉴스만이 아니라 과거의 신문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료를 찾을 수도 있다'고도 전망

이성규 2019년 06월 17일

다음은 1990년 4월1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동아일보가 충정로 사옥 신축을 계기로 그려보던 21세기의 동아일보는 왜 오지 않았을까요? 정확히는 왜 그들이 전망한 '독자 맞춤형 터미널 신문'(언론사 전용 터미널)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을까요? 기술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기술이 개입해서였을까요? '맞춤 지면 신문'은 왜 개시되지 못했을까요? 기술의 부족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이었을까요?

동아일보는 1982년부터 이러한 뉴미디어 등장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1982년 이용수 기자가 쓴 기사 '컴퓨터 제작 스크린 지면 신문 제3, 제4세대로'의 가장 하단 문장을 보면 "신문사와 계약된 터미털을 가진 독자는 당일의 뉴스만이 아니라 과거의 신문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료를 찾을 수도 있고 신문사가 제공하는 각종 특별 프로그램도 제공받는 특전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1990년의 기사는 사실 이 기사의 재판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동아일보는 비판하거나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당시의 다른 언론사들도 비슷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을 겁니다. 매일경제의 MEET, 한국경제의 KETEL은 그 전망을 구현하기 위한 원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동아일보는 10~20년 이후의 비전을 제시하며 신문의 청사진을 그려냈다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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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뉴스의 데이터베이스화. 독자들이 동아일보사와 연결돼있는 컴퓨터 터미널을 통해 그날 그날 신문사에 입수되는 국내외 최신정보를 선별해서 볼 수 있게 된다. (중략)

21세기의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로컬 뉴스를 각 가정 단위로 세분화해, 독자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는 여분의 지면이 합쇄된 신문을 받아보게 된다. 일례로 경제에 관심이 없는 독자들은 4~5페이지에 달하는 주식란을 싣고 있는 신문을 보지 않아도 된다. 공통 페이지의 신문이 인쇄되면 발송장에서 컴퓨터의 지시에 따라 독자가 원하는 지면이 선택적으로 추가돼 각 가정에 배달된다.

2000년대 동아일보는 인쇄기술 면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거쳤다. 소각가능한 레이저 디스킄의 실용화로 편집이 끝난 지면은 전산출력기를 거치지 않고 윤전기의 판 실린더에서 곧바로 직접을 제판, 인쇄공정이 대폭 단축된다."


김석순

Suksoon Kim 제 소견은 이렇습니다.
미디어 소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인간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뉴스의 소비, 미디어의 소비는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라는 점입니다.

신문은 고도로 큐레이션된 미디어입니다. 1면에 무슨 기사가 들어가고, 몇 면에 무슨 기사가 들어가고, 어떤 기사를 톱으로 쓰고 어떤 기사를 사이드톱에 쓰고 어떤 기사를 박스에 넣고 어떤 기사를 취재낙수로 배치하고(휴지통 등) 제목에 몇 호 활자를 쓰고, 어떤 제목을 달고, 중간 제목은 무엇을 달고, 리드는 무엇을 쓸지 라이터와 에디터가 엄청난 고민을 거쳐 결정한 뒤 내놓는 결과물입니다. 즉, 그날의 신문은 그날의 코스요리와 같습니다. 오늘 메인 메뉴는 이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맛이 있고 이것은 저런 맛이 있습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다 차려놓았으니 좋아하는 반찬이 있으면 그걸 드십시오. 하고 한 상 차림으로 내놓는 것이지요. 포인트는 '니가 정할 필요 없어. 우리가 차려서 내놓는다'입니다.

이러한 고도의 큐레이션이 들어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선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정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한 미디어 소비의 방식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포털이 뉴스편집권을 가지던 시절, 나는 동아일보를 보겠노라고, 나는 오마이뉴스를 보겠노라고 찾아서 읽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포털의 뉴스편집자가 정해준 대로 읽습니다. 주요 기사로 올라온 기사를 가장 먼저 클릭합니다.

맞춤형 뉴스의 한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해서 그 선택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유튜브조차도 '구독'을 하거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컨텐츠를 보거나, 자기가 아는 것 위주로 봅니다. 물론 검색과 뉴스가 결합되면서 좀 더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기는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편한 것을 원합니다.

1980년대 정보화시대를 예견하던 미디어기업은 대체로 동일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이 스스로 정보에 대한 능동적인 선택권을 가질 것이라고. 그러한 철학 아래 구상되었던 것이 맞춤형 신문 내지 터미널이었습니다. 독자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서 볼 것이라고.

자, 여기에서 게으른 인간이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합니다. 어떠한 미디어에 손발을 움직여 눈과 귀가 접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신문은 어떨까요? 신문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실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어려 있다고 해야 합니다. 기사를 쓰면 제작을 해야 하고, 제작을 하면 공무국에서 인쇄를 해야 하고, 인쇄를 하면 트럭과 기차에 실려 보급소나 가판으로 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인쇄노동자와 배달 노동자의 수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그걸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집 앞에, 사무실 책상 위에, 가판대에, 있는 신문을 집어 읽으면 됩니다. 방송도 비슷합니다. 정해진 시간 대에 리모컨을 이용하여 TV를 켜면 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맞춤형 신문이란 건, 일단 내가 원하는 뉴스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출력해야 합니다. 이 당시의 개념이 그렇습니다. 컴퓨터를 켜야 하고 프린터를 켜야 하고 팩시밀리를 켜야 합니다. 설정을 미리 세팅해 놓아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정보에 접근하기 위한 독자의 시간과 품이 듭니다. 집에서 누군가 차려준 밥을 먹는 게 편한가요 아니면 반찬가게에서 사온 반찬을 내 입맛에 맞게 '편집'해서 차려먹는 게 편한가요?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꼼꼼히 읽어보는 게 편한가요 그냥 남들이 시키는 것 위주로 적정한 선택지 내에서 고르는 게 편한가요? 구독, 즉subscription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문을 구독하는 것은 매우 저관여적인 행동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맞춤형 신문이나 전용 터미널의 경우 필연적으로 PC 등 IT 디바이스를 신문 독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휴대폰 등 개인 IT 디바이스가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전달 수단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맞춤형 뉴스가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IT 디바이스가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여러분 중에 네이버의 뉴스 큐레이션에 따라 3개 매체만 '구독'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냥 포털의 뉴스 편집자가 골라주는 옛날이 편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시는지요?

요즘은 아이패드 같이 미디어 소비 전용 미디어 기기들이 많기 때문에 미국 신문들이 하는 것처럼 신문의 1면을 독자가 원하는 뉴스만으로 편집해서 내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CRT 모니터로도 그런 건 구현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신문을 읽는 행위 자체가 저관여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출근하기 전 아침을 먹으면서, 출근을 하면서 신문을 봅니다(뉴스를 소비합니다). 그렇게 꼼꼼히 뉴스를 읽지 않습니다. 뉴스는 보는 것이지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CRT 모니터에 구현하든 아몰레드 모니터에 구현하든, 어쨌든 그냥 쓱 보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독자의 고관여를 요구하는 매체 소비방식이 요구된다면, 그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포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컴퓨터를 켜고 뉴스를 보는 행위는 매우 고관여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포털이 등장한 뒤 메인 화면에서 뉴스를 보기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첫 화면에서 뉴스를 보기 시작하면서, IT 기기를 이용한 뉴스 소비는 저관여적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냥 일상 생활에 부수되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음악 산업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의 싱글을 찾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고관여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별 생각없이 그냥 음악이 흘러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라디오입니다. 이 생각을 구체화한 곳이 스포티파이입니다. 플레이리스트에 중점을 두었으니까요.

요약하자면, 1980년대 미디어기업이 예측한 미디어 소비는 IT 기기를 이용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미디어 소비자였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은 게으르다(만약 그렇게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신문을 '일'로서 읽는 사람이겠지요). 즉, 소비자의 소비방법에 대한 철학이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디어기업의 잘못이 아니다. 1980년대 정보화 시대를 예견한 미국의 구루들은 다 그렇게 예견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마치 아르파넷이 인류의 진보에 큰 공헌을 하리라고 예견한 것과 마찬가지다. 아르파넷은 인간에게 쥐어진 유용한 도구였지만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는 인간에게 달려 있었다. 아르파넷도 결국 인간의 본성을 이기지 못했다.

또한 부수적으로, 업무용 IT디바이스가 홈 디바이스로 보편화되리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IT디바이스가 홈 디바이스로 변화하는 때에 비로소 맞춤형 뉴스 전달체계가 의미가 있게 된다. 그것이 저의 부수적인 문제의식입니다.

얼핏 기억나는 게, 예전에 삼성에서 팩스를 TV광고하면서 이것의 포지셔닝을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빠는 집에서 (회사에서 처리 못한) 업무처리를 하는데, 엄마는 주부들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당연히 보편적으로 먹히기 어려운 포지셔닝이었지요. 왜냐, 팩스는 홈디바이스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인데다가 다른 저렴한 대체수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야근을 하거나 전화로 업무를 처리하면 되고 엄마도 전화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즉 IT디바이스의 가격도 무시못할 요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ADSL의 등장 이전까지는 네트워크의 비용이 비쌌던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맞춤형 뉴스의 실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독자의 고관여를 요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고관여를 저관여로 바꾸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알고리즘이다. 라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입니다.

권기범

권기범 저희 회사 이야기라 그냥 지나다가 생각해보았는데, 1982년은 국내에 인터넷의 시초인 SDN이 개통된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독자와 언론사가 1대1로 연결되는 터미널에 대한 구상은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다만 1989년 미국에서 www이 탄생하면서 그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는데 1990년에 국내 일간지가 그런 변화를 감지하기는 조금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중들이 PC통신을 본격적으로 접한 시기가 90년대 중순 이후였던 걸 생각해보면...
결국 1990년대 이후 인터넷 중심으로의 흐름을 선진적으로 캐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당시에 가장 큰 논리는 비용 대비 실익이 적었기 때문었겠지만..

이성규

장문의 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역시 통찰이 느껴집니다.
일단 전제는 정말 동감. 대신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수용자의 능동성을 직접적 능동성과 간접적 능동성으로 구분해보는 거죠. 직접적 능동성은 동아일보가 당시에 기대했던 대로 자신의 소비하고 싶은 뉴스의 영역을 스스로 직접적,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라고 하고, 간접적 능동성은 직접적 선택을 하지 않지만, 소비 행위 자체를 통해 선택과 선호의 신호를 보내는 행위라고 보는 거지요.

콘텐츠 소비 측면에서 수용자들이 수동적인 것은 정상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얘기했던 대로 이 걸 간과하면 서비스가 작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콘텐츠라는 영역에서 말이죠. 얘기했던 대로 1980년대 신문 종사자들은 새로운 미디어의 혁명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서, 뉴스 소비자들은 직접적 능동성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이게 보기 좋게 빗나간 거죠. 뉴스 소비자들은 정보량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맞춤형 뉴스를 기대했지만, 그런 행위를 원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맞춤형 뉴스와 능동적 행위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포털이 나아가 지금의 알고리즘 편집이 작동하는 배경도 이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포털은 PC 통신 시대를 거치면서 학습한 게 있을 겁니다. 나눠서 분석해보면.

[수용자/사회 변화] 일단 수용자들은 87년 민주화와 97년 정권교체 이후 각 언론사들의 정파성이 심화하면서 특정 언론사의 전용 뉴스만을 보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인식했죠. 여기에 88년 한겨레가 창간되면서 빅4 체제가 정파와 이념의 분리 체제로 분화되고 선택지도 넓어지기도 했고요. 동아일보의 전용 터미널 프로젝트가 엇나가기 시작한 건 대략 이때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정 언론사의 뉴스만 소비할 경우 놓치는 관점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우려과 염려. 그런 심리상태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시점이 아닐까 합니다.

포털은 이 심리상태를 일찍 간파했고, 뉴스 애그리게이팅으로 낮은 수준의 맞춤형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봅니다. 여러 뉴스를 개별 단위로 원자화해서 해체한 뒤, 이를 재묶음으로 배열해서 '동일 사안 다른 시각'의 욕망을 충족시켜줬다고 봅니다. 현재는 이를 알고리즘으로 구현하고 있죠. 굳이 수용자가 선택 행위를 하지 않아도 선호 뉴스를 확인할 수 있는 '간접적 능동성'을 활용한 사례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술적 변화] PC 통신 시대만 하더라도 여전히 전용 단말의 가능성은 존재했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쌌습니다. 예를 들어 1987년 4월 개통한 한국경제신문의 KETEL을 이용하려면 16비트급 컴퓨터와 모뎀이 필수적이었고, 여기에 동일 프로토콜 조건을 만족시키는 접속 소프트웨어까지 구매하려면 도합 수백만원 비용이 요구됐습니다(신동호, 1990). 하지만 전용 단말기를 구매하면 훨씬 저렴하게 접속할 수 있었죠. 한국경제신문의 KETEL(프리스텔의 시작은 1986년)의 초기 성공적인 안착은 동아일보의 구상에 확신을 심어줬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상대적으로 높은 PC 가격을 감안했을 때 전용 터미널을 상상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을 듯합니다. 1991년 출시된 PC통신 전용 터미널(하이텔 단말기, 프랑스 미니텔 변형)을 당시에 무료로 배포하며 가입자를 유치한 것도 이러한 기술적 조건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 PC 가격이 빠르게 하락했고, 네트워크 환경도 급변했습니다. 텍스트, 비디오텍스, 오디오텍스로 나뉘어 전용 단말 중심으로 운영되던 세상은 http 프로토콜(애플리케이션 레이어) 하에서 웹 기반으로 통합됐죠.

[결론] 결국 동아일보의 그림대로 풀리지 않은 것은 얘기했던 대로 수용자를 '직접적 능동성'을 갖춘 주체로 전제했다는 사실과 당시 언론사 정파성이 심화하는 흐름을 자신의 프로젝트에 반영하지 못했던 측면, PC 가격의 하락으로 범용 디바이스의 보편화 속도에 맞춰 전략을 수정하지 않았거나 이에 맞춰 서비스 조정을 주도하지 못했던 측면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의 생각은. ^^

image 최영락, 정기동, 엄장일, 차의영. (1990)

참고문헌

  • 신동호. (1990). 컴퓨터와 정보은행. 말, (), 192-197.
  • 최영락, 정기동, 엄장일, 차의영. (1990). 비디오텍스를 이용한 지역정보망 구축에 관한 연구. 연구보고, (), 1-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