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니먼랩의 연말 시리즈 'PREDICTIONS FOR JOURNALISM 2021' 가운데 파블로 보즈코브스키(Pablo Boczkowski) 교수의 전망을 번역한 것입니다. 굳이 그의 전망만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의 저서를 통해 발견한 그의 탁월한 디지털 저널리즘에 대한 통찰과 견해 때문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뉴스룸의 수용자들에 대한 그간의 인식이 근대성의 부산물이었다고 바라보면서, 벗어날 것을 주문합니다. 수용자들의 가슴이 만들어낸 해석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그것에 호소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객관성과의 마찰/충돌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21세기 향후 30년 동안 번성을 위해서, 저널리즘은 그들만의 이미지로 수용자를 생각하는 방식을 중단해야 합니다."

한때,언론인들은 수용자들을 자신의 이미지대로 사고했습니다. 즉, 수용자들은 전반적으로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해됐죠. 게다가 수용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출처가 잘 알려지고 논쟁이 잘된 정보를 받는 데 만족했으며, 다소 냉정하게 처리하는 데에도 만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평판이 좋은 주류 언론사에서 읽고, 보고, 들은 뉴스를 대부분 신뢰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뉴스와 관련된 현재 관행 그리고 대화의 내용이나 대의, 동학 등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른 그림이 드러납니다. 수용자들은 예전보다 집단적(tribal)이고, 표현지향적이며, 감정적이고, 회의적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미국 전역의 많은 뉴스룸과 강의실에서 그들에 대한 정식 담론(canonical discourse)에서 가정했던 것보다 더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수용자들은 추상적인 '공공의 선'(greater good)을 유지함으로써 그 자신들을 거대한 정치적 관계 속으로 묶여버리는 비인격적 유대보다는 집단 프로젝트 내의 부족 관계에 의해 더 많은 동기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부족적'입니다. 그 공공의 선은 큰 차이와 오랜 불평등을 없애거나 무마하는 대가로 유지되어 온 것이기도 합니다.

수용자들은 기술적 전문성에도 불구하고(정확히는 그것 때문에) 뉴스 매체가 제공하는 보도를 성실하게 듣는 것보다 자신과 친족 네트워크에 있는 사람들, 즉 그들에게 중요한 이야기들로 소통하는 것(그러한 소통 관행으로 사회화 함)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표현지향적입니다.

현재의 뉴스 소비 관행은 그 해석이 정신(mind)만큼이나 가슴(heart)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감정적이며, 따라서 개인이 뉴스를 이해하는 중심 방식으로서 냉철한 인식의 우선성 개념에서 벗어납니다.

수용자들은 더 이상 뉴스에 대한 신뢰를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저널리스트들이 얻어야 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개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오히려 빨리 사라질 수 있는 것으로 신뢰로 다루기 때문에 회의적입니다.

정치적, 수용적, 합리적, 신뢰 지향적 수용자들은 근대성 프로젝트의 일부이자 구획이었습니다. 친족 관계, 차이, 표현, 감정, 사회성, 회의주의에 끌리는 뉴스 수용자들의 현재 관행은 근대성이 영원할 것이라는 꿈을 연장시키는 것에 도전합니다. 따라서 저널리즘의 번성을 위해서라도, 저널리즘은 더 이상 근대성과 근대화의 프로젝트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프로젝트가 문제 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초 30년 동안 저널리즘이 번성하기 위해서, 저널리즘은 그들 자신만의 이미지로 수용자를 인식하는 방식을 중단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있길 원하는 곳이 아닌 그들이 있는 곳에서 수용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하고 리드할 수 있는 척하는 걸 그만두고, 대신 듣고 그들에게 리드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며, 대단히 중요한 내러티브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특정 공동체가 선호해 온,  정치의 비인격적 이상을 우선시하기보다는, 살아있는 경험의 차이를 인정하고 친족 네트워크를 근본적인 사회적 유대로서 인식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또한 어떤 저널리스트들이 보도할 것인가(수 있는가)에 대해 사회적 세계의 진화하는 문화와 일치하지 않는 직업 규범 및 편집 의례에 의해 가능해졌던 오염되지 않은 횃대(pristine perch)에서 (내려다보듯) 강의하는 대신, 그들에게 표현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런 다음 수용자들이 말해야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을 수반합니다.  

이는 또한 단순히 뉴스의 객관성 의무 때문에 사건에 대한 냉철한 설명을 계속 제공하는 것보다는 정신만큼이나 가슴에서 비롯된 해석에 호소하는 형태로 스토리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불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사실을 찾는 방법과 스토리 프레이밍의 가정에 투명성을 제공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사용자, 독자, 시청자 및 수용자의 달성하기 어려웠던 신뢰를 얻어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기의 초반 30년 동안, 저널리즘은 사회 정의를 향상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수용자들을 다시 참여시키고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는 기반(bedrock)이기 때문입니다.

수용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저널리즘이 적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