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문이나 경제 기사 많이 읽으시죠? 코로나19로 정부의 재정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재난지원금 등에 대한 기대들이 많이 오갈 때 경제신문이나 경제 기사에 대한 의존은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부동산 정책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가 부동산 규제와 세금 정책을 어떤 식으로 설계하고 발표하느냐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습니다. 자산의 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경제신문 등을 읽으면서 간혹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은 없나요? ‘경제정책을 설명하고 평가하는 관점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는 생각 말이죠. 여러 경제신문을 들여다봐도 인용되는 전문가나 경제학자, 경제 현상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발견하기가 실은 쉽지 않습니다. 기자 스스로도 이런 고민에 빠질 때가 있기도 할 겁니다.

오늘은 학술지 ‘저널리즘’(임팩트 펙터 4.436)에 발표된 핀란드 Timo Harjuniemi(헬싱키대 박사후 연구원)의 논문 ‘The Power of primary definers: How journalists assess the pluralism of economic journalism’을 중심으로 그 원인과 시사점을 살펴볼까 합니다.

경제신문에 다원주의가 중요한 까닭

Timo Harjuniemi. 출처 : https://www.kansanuutiset.fi/artikkeli/4222399-talouskriisissa-journalismi-valitsi-puolensa-ja-se-oli-kuri

2008년으로 돌아가볼까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을 때입니다. 듣기만 해도 진저리쳐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원인이었죠. 금융위기를 부른 핵심 원인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지목되면서, 이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더랬죠. ‘왜 예측하지 못했냐’, ‘왜 위험을 미리 경고하지 않았냐’는 성토가 대다수였습니다. 당시를 상황을 기술한 신문과방송의 기고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번 금융위기의 진행 상황이 이처럼 여러 해에 걸쳐 점진적인 양상을 보임에 따라 사태 악화나 위기도래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경고하는 언론의 기능은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예보기능은 커녕, 상황이나 사태 진전을 좇는 기사조차 과잉반응으로 불안을 증폭시켜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언론이 특유의 제목 뽑기식 과장보도나 호들갑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보도(crisis reporting)에 대한 이런 비판적 시각은 금년초까지 뉴욕타임스 기자로 뛰었던 데이비드 존스턴에서 엿볼 수 있다.”

단일 관점의 분석과 평가, 프레임에 갇혀있던 당시의 경제신문들의 역할 부재를 꼬집는 글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 측면이든 분석 프레임의 측면이든 ‘단일 관점’만이 대변되고 보도되는 경제 저널리즘 환경은 위 사례처럼 위태로운 결과를 초래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기여를 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널리즘이 다른 관점의 보도도 함께 전달했더라면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경제정책 등에서 저널리즘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언론 탓으로 돌릴 수도 없고요. 그럼에도 경제 저널리즘이 하나의 시각과 관점에 갇혀 있을 때 한 사회의 위기 신호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경제 저널리즘의 역할은 대체 뭔가에 대한 회의적 평가를 낳을 수도 있고요.

경제 저널리즘의 ‘단일 관점‘ 경향성은 특정 국가에 한정된 흐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위 논문은 핀란드의 사례를 바탕으로 작성이 됐는데요. 핀란드에서도 경제 저널리즘의 ’다원성 결여‘ 문제는 동일했더군요. 어쩌면 전세계 경제 저널리즘의 보편적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원주의(Pluralism)란?

Pixabay로부터 입수된 Gerd Altmann님의 이미지 입니다.

‘왜‘를 따져보기에 앞서 다원주의의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 논문은 다원주의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slippery) 개념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요.단일 관점의 반대용어로 다원주의를 이해하면 쉽게 손에 잡힐 겁니다.

일반적으로 다원주의는 뉴스룸 내의 구성원 다양성, 정보원/취재원의의 다양성을 지칭하는 용도로도 쓰입니다. 하지만 Maeseele과 Raeijmaekers는 여기에 한정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새로 등장하는 벨기에 학자 두 분은 일단 기억해 두시는 게 좋습니다. 뒤에 한번 더 제가 인용을 할 거거든요. 두 학자는 저널리즘 콘텐츠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성 관점에서도 분석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널리즘의 다원주의를 취재원의 다양성뿐 아니라 이념적 다원성도 포괄해야 한다는 거죠.

이 두 학자들은 샹탈 무페의 개념을 빌려와, “저널리즘은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세계관 사이의 논쟁적/경합적 토론(agonistic debate)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했습니다.

이를 경제 저널리즘에 적용하면, 경제 이슈나 정책을 정치의제화 해서 민주적 토론의 장에서 다양한 관점들끼리 경합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원주의는 그래서 동일 이념의 다양한 취재원 인용에 그치지 않고 이념적 다양성을 포함하는 보도행위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되게 됩니다.

일차 정의자(Primary Definer)와 일차 해석자

Pixabay로부터 입수된 Klaus Dieter vom Wangenheim님의 이미지 입니다.

경제 저널리즘은 이러한 다원주의의 개념에서 볼 때 다원성이 충분히 구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죠. 경제 현상이나 정책에 대한 특정 이념이나 신념, 관점, 세계관만 투영되는 경향이 짙다는 의미입니다. 기자 스스로도 이러한 이념에 부지불식간 녹아들게 되면서 다른 관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패턴이기도 합니다.

이 논문은 홀의 ‘일차 정의자‘(primary definer)의 프레임워크로 원인을 진단합니다. 기왕 공부하는 거 조금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개념을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또다른 논문이 있는데요. 이화여대 김영욱 교수의 것입니다. 인용을 해볼게요.

“사회에는 신뢰도의 계층화가 존재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상위의 신뢰도를 확보함으로써 어떤 사안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주장하는 개념 정의가 언론에 채택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대략 감이 오죠? ‘일차 정의자‘는 모든 개념을 우선 정의하고 해석하고 설파하는 권력을 지닌 상층부 엘리트 집단을 뜻합니다. 이들 일차 정의자는 일차 해석을 내놓게 되고 기자들은 그들의 정의와 해석을 신뢰 높은 대상으로 간주해서 인용하고 보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자 사회 내부에서 그들은 가장 믿을 만하며 권위가 있는 인용대상인 셈이죠.

한국의 경제 저널리즘으로 넘어오게 되면, 일차 정의자는 대체로 경제부처의 고위 당국자(장차관 및 고위공무원), 한국은행의 핵심 간부들, 영향력 있는 경제연구소의 핵심 연구자들이 될 것입니다. 일부 수도권 대학의 경제학자들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 위 논문에서는 핀란드의 경제부 당국자, 핀란드 은행, 벵트 로베르트 홀름스트룀 같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등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제 저널리즘의 다원성은 ‘합법적 논쟁의 장‘이 펼쳐질 때 높아지는데요. 이러한 일차 정의자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논쟁의 장이 서지 않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특권적이고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일차정의자 입장은 세계에 대한 협소한 엘리트적 해석을 기자들이 객관적인 사회 현실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논문에 따르면 실제 핀란드 경제 저널리스트들도 이러한 로직과 문제를 잘 알고 있더군요. 다원성 결여에 대해 안타까워 하고 있고, 일차 정의자들이 경제정책 논쟁에서 컨센서스를 구축하기도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문제는 이들 일차 정의자들을 당파성이나 정치에 무심한 집단처럼 묘사되거나 간주된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이들 일차 정의자들의 시각과 반대되는 관점을 타당하지 않는 의견이나 해석으로 평가하게 되고 때론 오히려 편향적이라고 인식해 배제하게 된다고도 합니다. 핀란드 경제 담당 기자들의 목소리가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디어들은 일차 정의자와 다른 관점을 지닌 경제학자나 전문가를 적합하지 않는 자로 여기고 이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지 않게 되더라는 겁니다. 마치 전문가를 사칭하는 사람들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들의 목소리를 싣는 보도행위를 ‘잘못된 기계적 균형’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이 부분이 무척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이었습니다. 국내 경제 쪽 담당 기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요.

일차 정의자 엘리트 집단 내의 균열과 다원주의

이 논문은 새로운 발견점은 팬데믹으로부터 도출이 됐습니다. 팬데믹은 이 주류 엘리트 사회의 균열을 불러내게 되는데요. 특히 재정 규율(fiscal discipline), 예산 규율(budgetary discipline)에서 두드러졌습니다. 일차 정의자 집단 안에서 진리처럼 통용돼 왔던 전통적 경제 관점이 팬데믹 상황으로 파열음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파열과 균열이 경제 저널리즘의 다원주의를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거죠. 재정 적자를 얼마나 감내할 것인가, 확장적 재정 정책의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크게 찢어지게 된 겁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을 떠올려 보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러고 보니 핀란드와 우리가 닮은 측면도 많죠?

특정 관점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신뢰가 엘리트 내집단의 균형과 갈등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고, 이것이 경제 저널리즘의 다원주의의 여지를 키우는 역설적인 상황을 빚어낸 것입니다. 기 구축된 정통적인 관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념적 편향으로 간주하던 경제 저널리스트들에게 새로운 관점의 룸이 열린 것입니다. 사실 핀란드 기자들에게도 재정적 보수주의 스탠스는 상식처럼 통용돼 왔던 관점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고에 변화가 생긴 거죠.

경제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려면

제가 이 논문을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경제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방식을 토론해 보기 위함입니다. 사실 경제 보도에 저널리즘이라는 개념이 부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보도 행위가 저널리즘의 지향과 미션을 실현시키는데 조금이라고 기여해야만 합니다. 저널리즘은 진실에 관한 것이고, 공익에 관한 것이며 민주주의를 위한 것입니다. 경제 보도가 저널리즘과 결합되기 위해선 이를 입증해내야 하죠. 그렇다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만이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아닙니다.

앞서 제가 Maeseele과 Raeijmaekers라는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죠. 이 두분이 쓴 논문이 정말 유익합니다. 2015년에 발표된 ‘Media, Pluralism and Democracy: What’s in name?‘이라는 제목의 논문입니다. 미디어와 다원주의, 민주주의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서 다원주의를 여러 차원에서 재정의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미디어의 어떤 다원주의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죠. 정치철학 같기도 하고 커뮤니케이션 논문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결론부만 알려드리면, 비판적 다원주의 접근법이 거의 유일하게 미디어 민주주의 담론을 가능케 한다는 겁니다. 미디어 민주주의 담론을 3가지(자유집약 모델, 숙의 민주주의 모델, 논쟁/경합적 민주주의 모델)로 구분한 뒤에 내린 결론입니다.

비판적 다원주의 전제 조건은 논쟁과 쟁투입니다. 이 유형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투쟁의 공간’, ‘쟁론의 장’를 들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논쟁을 드러내고 경합시켜야 한다는 거죠. 탈정치화, 후기 민주주의론이 이데올로기의 종식을 결과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그래서 더 논쟁해야 한다는 거죠. 그랬을 때 민주주의 담론과 미디어의 역할이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결론부를 조금 인용해 볼까요?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비판적 다원주의적 접근만이 공적 담론을 평가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미디어 담론을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원칙에 대한 민주적 토론이 장려되는 정도에 따라 불일치 의견에 대한 정당한 표현과 다양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경제신문 기자들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지면에 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국내에 취재에 응해줄 만한 권위있는 인재풀이 많은지도 고민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경제신문, 경제보도가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을 갖고 싶다면, 그래서 자부심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러한 학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차 정의자와 다른 해석과 접근법을 이단적 / 편향적으로 바라보는 ‘관성’을 되돌아보는 게 그 첫 번째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문헌

  • 김영욱. (2006). 뉴스 속성의 정보소스 의존 정도: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언론보도와 정부 제공 이슈속성의 관련성 중심. 한국언론정보학보, 75-111.
  • Harjuniemi, T. (2021). The power of primary definers: How journalists assess the pluralism of economic journalism. Journalism, 14648849211035299.
  • Raeijmaekers, D., & Maeseele, P. (2015). Media, pluralism and democracy: what’s in a name?. Media, culture & society, 37(7), 1042-1059.